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왜 곧 유죄가 아닐까요?

뉴스 자막에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라는 말이 뜨면, 강의실에서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그럼 재판소가 이미 잘못을 인정한 건가요?” 두 사건은 구별해야 합니다. 제소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의 법적 분쟁을 재판소에 가져가는 절차이고, 잘못이 있었는지는 그 뒤에 따질 문제입니다.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는 무슨 뜻일까요?
국제사법재판소는 유엔의 주요 사법기관입니다. 1945년 유엔 헌장과 함께 설립됐고 1946년부터 활동했습니다. 국가 사이의 법적 분쟁을 다루는 재판과, 유엔 기관 등의 요청에 법률적 의견을 제시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뉴스에서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제소했다’고 할 때는 대개 국가 간 재판을 가리킵니다.
이 재판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국가입니다. 개인이나 시민단체가 직접 소송을 내는 곳은 아닙니다. 전쟁범죄 혐의를 받는 개인의 형사책임을 다루는 국제형사재판소와도 역할이 다릅니다. 두 기관의 이름이 비슷해도, 누가 재판받고 무엇을 판단하는지부터 다릅니다.
절차는 보통 한 국가가 분쟁의 내용과 상대 국가를 적은 신청서를 내면서 시작됩니다. 제소를 당한 나라가 그 주장에 동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판소는 먼저 이 분쟁을 심리할 권한이 있는지 따져야 하고, 그다음 사실관계와 국제법 위반 여부를 검토합니다.
상대국이 반대해도 재판이 열리는 이유는 뭘까요?
국가 간 재판에는 관할권이라는 문턱이 있습니다. 관할권은 재판소가 해당 분쟁을 판단할 법적 권한입니다. 국가가 주권을 가진 만큼, 국제사법재판소도 모든 국가 간 갈등을 자동으로 심리하지는 못합니다.
동의하는 방식은 하나가 아닙니다. 분쟁이 생긴 뒤 두 나라가 함께 재판을 맡길 수도 있고, 미리 가입한 조약의 조항을 통해 특정 분쟁을 맡기기로 약속했을 수도 있습니다. 일정한 조건 아래 재판소의 강제관할을 인정한다는 선언을 한 국가들 사이에서 재판이 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국이 지금 제소에 반대하더라도, 앞서 한 약속이 관할권의 근거가 되는지를 따지게 됩니다.
그 약속의 범위도 중요합니다. 어떤 조약에 재판 조항이 있다고 해서 두 나라 사이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심판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소한 국가는 자신의 주장이 해당 조약의 해석이나 적용에 관한 분쟁임을 설명해야 합니다. 상대국은 분쟁의 성격이나 조약의 적용 범위를 다툴 수 있습니다.
제소 뒤 나온 긴급 명령은 최종 판단일까요?
소송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사이 보호하려는 권리가 돌이키기 어렵게 훼손될 위험이 있다면, 재판소는 잠정조치를 명할 수 있습니다. 증거를 보존하거나 특정 행위를 막는 식입니다. 잠정조치는 최종 판단이 나올 때까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며, 그 자체로 본안의 위반 여부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려진 잠정조치에는 법적 구속력이 있습니다.
날짜를 따라가면 차이가 더 선명합니다. 감비아는 2019년 11월 11일 미얀마를 집단학살협약 위반 혐의로 제소하면서 잠정조치를 요청했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2020년 1월 23일 로힝야족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잠정조치를 명했습니다. 이때 재판소가 검토한 것은 긴급한 보호가 필요한지였습니다. 협약 위반에 대한 최종 판단을 그날 내린 것은 아닙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도 2023년 12월 29일 가자지구와 관련해 이스라엘을 제소하고 잠정조치를 요청했습니다. 재판소는 2024년 1월 26일 이스라엘에 집단학살협약상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권한 안에서 가능한 조치를 취하라는 등의 명령을 내렸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협약 위반을 주장했고, 이스라엘은 이를 부인했습니다. 이 명령을 읽을 때도 양국의 주장, 잠정조치의 내용, 훗날의 본안 판단을 각각 구분해야 합니다.
판결이 나오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재판소가 관할권을 인정하고 본안을 심리하면 양측의 서면 주장과 구두 변론, 제출 자료를 검토해 판결합니다. 제소한 쪽의 주장 전체가 받아들여질 수도, 일부만 받아들여질 수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소됐다’는 기사 제목만으로 어느 결과가 나올지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최종 판결은 해당 사건의 당사국에 구속력을 가집니다. 유엔 헌장 제94조는 유엔 회원국이 자신이 당사자인 사건에서 재판소의 판결을 이행할 의무를 규정합니다. 이행하지 않는 경우 상대국은 안전보장이사회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고, 안전보장이사회는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권고하거나 조치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판결의 법적 의무와 실제 이행 과정은 이렇게 구별됩니다.
저는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라는 다섯 글자를 볼 때마다 먼저 날짜를 확인합니다. 신청서를 낸 날인지, 잠정조치가 나온 날인지, 최종 판결이 선고된 날인지에 따라 뉴스가 전하는 사실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어 어떤 조약을 근거로 삼았는지, 양측이 무엇을 주장하는지까지 보면 짧은 제목 뒤에 놓인 분쟁의 윤곽이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