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축제는 왜 평택에서 열렸을까요?

시사 강의에서 ‘한미동맹 70주년 대축제’ 사진을 보여주면 뜻밖의 질문이 나옵니다. 왜 기념행사를 서울이 아닌 평택의 미군기지 앞에서 열었느냐는 겁니다. 공연과 퍼레이드가 눈에 먼저 들어오지만, 장소와 날짜를 따라가면 이 축제가 무엇을 기념했는지 더 분명해집니다.
한미동맹축제는 어떤 행사였나
‘한미동맹축제’라고 부르는 행사 가운데 평택에서 열린 대표적인 사례는 2023년 ‘한미동맹 70주년 대축제’입니다. 평택시 안내에 따르면 행사는 2023년 10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 캠프 험프리스 정문 앞 도로에서 열렸습니다. 외교부·경기도·평택시가 주최하고 평택시국제교류재단이 주관했습니다. 당시 행사이므로 이 날짜를 올해 축제 일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평택시가 사전에 공개한 계획에는 동맹의 역사를 다룬 전시, 한미 우정 퍼레이드, 문화체험 부스, 공연이 담겼습니다. 10월 7일에는 캠프 험프리스의 부대 개방 행사와도 연계했습니다. 주한미군과 가족, 평택 시민이 같은 거리에서 만나는 방식이었습니다. 기념식만으로 채우지 않고 음식과 체험을 넣은 이유도 행사 대상이 외교·군사 관계자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숫자를 읽을 때는 시점을 구분해야 합니다. 평택시의 사전 안내에는 예상 대상 인원 2만 명이 적혀 있습니다. 반면 평택시국제교류재단의 활동 자료에는 이 대축제 참여 인원이 5만 명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앞의 숫자는 행사 전 계획, 뒤의 숫자는 재단이 사후 자료에 실은 참여 인원입니다. 두 수치를 같은 기준의 집계처럼 비교하면 행사의 규모를 잘못 이해하기 쉽습니다.
70주년은 어느 날부터 계산했을까
출발점은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이 아닙니다.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됐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해 10월 1일 서명됐습니다. 2023년의 ‘동맹 70주년’은 조약 서명일을 기준으로 계산한 표현입니다. 외교부에 따르면 조약은 양국의 비준 절차를 거쳐 1954년 11월 18일 발효됐습니다. 서명한 날과 실제로 효력이 생긴 날이 다르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상호방위조약은 양국이 외부의 무력 공격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한 틀을 세운 문서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쪽이 모든 경우에 자동으로 참전한다는 뜻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조약에는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른 대응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동맹’이라는 익숙한 말도 조약의 문구를 함께 봐야 정확해지는 이유입니다.
왜 평택의 기지 앞이었을까
평택은 주한미군의 주요 거점인 캠프 험프리스가 있는 도시입니다. 주한미군은 2018년 6월 캠프 험프리스에 새 본부 건물을 열고 서울에서 본부를 옮겼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니 평택은 동맹을 추상적인 외교 구호로만 접하는 곳이 아닙니다. 기지에서 일하거나 생활하는 사람들과 인근 주민이 같은 교통망과 상권, 생활공간을 이용하는 곳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축제가 갖는 의미는 두 겹입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조약 체결을 기념합니다. 지역 차원에서는 평소 접점이 적을 수 있는 주민과 미군 가족이 공연을 보고 음식을 나누며 만납니다. 평택시국제교류재단도 한미친선 사업을 주한미군과 평택 시민을 연결하는 활동으로 소개합니다. 대축제 외에 문화 행사, 생활 안내, 봉사활동을 함께 운영한 기록이 있습니다. 축제 하루만으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인 교류를 눈에 보이게 하는 장면은 될 수 있습니다.
축제의 성과는 무엇으로 판단할까
행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서로의 문화를 접하고 지역 주민이 기지와 그곳 사람들을 조금 더 가까이 이해할 기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인 참여와 방문객 유입도 지역에는 관심사입니다. 반면 행사장 주변 주민에게는 도로 통제, 소음, 쓰레기 처리처럼 구체적인 생활 문제가 먼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묻는 것이 교류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참여 인원만으로 성패를 가르기는 어렵습니다. 주민과 미군 가족이 실제로 얼마나 함께했는지, 지역 상인이 어떤 방식으로 참여했는지, 행사 뒤 불편 신고와 개선 사항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사전 계획의 2만 명과 재단 자료의 5만 명이라는 숫자는 규모를 알려주지만, 교류의 질까지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제가 이 축제를 설명할 때 먼저 적는 날짜는 1953년 10월 1일이고, 다음으로 적는 장소는 평택 캠프 험프리스 정문 앞입니다. 하나는 동맹의 제도적 출발을, 다른 하나는 그 관계가 지역의 일상과 만나는 지점을 보여줍니다. 축제의 의미도 그 두 장면을 함께 놓을 때 더 또렷해집니다.
